주변환경에 지나치게 익숙해지지 말 것. 당연한 게 어딨니?
어렸을 때의 나는 주변 환경에 금방 적응하는 편이었다.
이사를 엄청 많이 한 건 아니지만, 초등학교만 3곳을 다녔고
그 과정에서 아예 환경이 바뀌어 모르는 사람속에서 지내야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가 적응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어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지만ㅎㅎ
한국에서 당연한 것들이 일본에서는 당연하지 않듯이,
일본에 살다보면 자연스레 일본 사회에 녹아들어, 사람이 변해간다는 걸 느낀다.
예를 들어, 분명히 한국에서 제공받을 수 있던 서비스에서 비하면 불편한 것인데도
'여기서는 원래 그런 것'으로 여기게 되거나,
누군가의 서비스는 더도말도 덜도말고 돈을 준 만큼만 하면 되는 것과 같이
정해진 룰을 최대한 잘 지켜나가는 것을 중요시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돈을 준 만큼'은 얼마가 기준인가?)
일본에 오래 살았다 싶은 사람들을 보면 이런 느낌이 물씬 난다.
도쿄에는 어디에나 한국인이 있기 때문에
나는 한국어가 들려도 사실 크게 신경쓰질 않지만,
가끔은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지나가면 '저사람들은 이곳에서 뭐가 불편하다고 생각할까?'라고 혼자 생각해본다.
불편함을 개선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질이 좋아지는 것이 아닐까?
나는 한국과 일본의 불편한 것들을 잊고 사는 걸까, 애써 외면하고 사는 걸까?
"이건 왜 그런 거야? 이건 왜 이렇게 했지?"
"왜 이것은 보수를 않는 거지? 칠을 어설프게라도 한번 했으면, 난간이 부스러질 정도로 삭지는 않았을텐데?"
"시키지 않은 일은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해도 하면 안되는 거야?"
이런 생각들을 내려놓고 살게 된다.
고도경제성장기에 갖춰진 일본의 인프라는 평시에 크게 손을 대기 어렵다.
내가 예를 들었던, "칠을 어설프게라도 했더라면..." 이것도 사실,
일본의 똑똑한 사람들이 모를 리도 없고, 빙빙 돌려말할 것없이 채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중대하고 시급한 위기가 눈앞에 닥치지 않고서야 소수를 위해 막대한 세금을 집행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한국은 사정이 다를까?
일본보다 사회 인프라를 갖춘 것이 시기적으로 뒤일 뿐 재원의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이므로,
누구나 예상하듯 저출산이 심화될수록 노후화되어 가는 사회기반시설들을 유지보수하기 어려운 곳들이 늘어날 거다.
내가 北海道(홋카이도)에서 받았던 충격은 여전히 선명하다.
이 넓은 땅을 고작 홋카이도민에게 걷는 세금만으로 유지해나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
단지 이러한 충격이나 불편함, 눈앞의 현실들을 고려했을 때
상대적으로 한국이 다 좋고, 일본이 다 좋고 그런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 가든 불편한 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더는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
"원래 그런 거야."
그런데, 아이들은 늘 묻는다.
내가 어렸을 때도 엄마 손을 붙잡고 그랬을 거고, 사춘기 때도 그랬다.
"그게 왜 당연한 거야?"
일본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려놓은 사회의 룰을 보이지 않는 선이라고 하면,
법규를 위반하지 않는 한에서 그 선을 뛰어넘을 생각조차 않게 되는 순간,
나는 일본에서 나고자란 척하는 가짜 일본인이 되는 게 아닐까?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에 당연한 것이 어디있다고...
누군가가 생각을 하고 계획하기 때문에 유무형의 자산들이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신년 첫 업무개시일의 저녁.
서빙하고 결제하던 사람들은 외국인이었다.
서빙을 하는 여자 직원은 중국인이었는데,
주방 가까운 자리여서 그런지 계속해서 중국어가 들려왔다.
서빙을 할 때도 일본인이면 당연히 할 법한 인사도 잘 못하고 어영부영 넘기고 만다.
식후 마실 차를 가지러 갔더니, 차를 내려주는 기계에 사용불가라고 쓰여있었다.
(식전에는 가져다주지만, 이후에는 셀프다.)
마침 서빙을 하던 중국인 직원이 정리를 하러 가까이 왔길래 "이거 못 쓰나요?" 라고 물어봤더니
"차, 여기!"
"?"
"차. 차!" 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お茶라고 쓰여있는 주전자가 놓여있었다.
계산을 할 때도 같은 직원이 와서 뭔가 묻는데, 말이 불분명한데다 마스크까지 끼고 있어서
같이 있던 아내도 알아듣지 못해 "네?"라고 되물었다.
알고보니 포인트 있냐는 이야기였다.
중화요리집도 아닌데, 중국 사람이 많은 가게는 중국어로 소통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흔하다.
그럴때면 가끔은 내가 중국에 와서 일본 요리를 주문하는 느낌이 든다.
중국에서 온 사람들은 어떤 것을 불편하게 생각할까?
일본과 중국의 접객은 너무나도 다른가?
일본의 외식업계가 일손부족에 시달려서 외국인을 환영하는 분위기라고는 하나,
일본인 직원에게 기대하는 접객 서비스의 기대치와는 상이해도 좋은 것인가?
외국인은 당연히 그런 것, 어쩌다 일본인같이 일하는 직원은 일잘하는 인재라고 인식되어도 되는, 정말로 그런 존재인가?
작년에 요코하마에서 만난, 일본 생활이 딱봐도 오래돼보이는 중국인은 접객이 일본인 같았다.
흘려들으면 일본인인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일본어도 매우 유창했고,
경직되어 있지 않아 되려 기분 좋은 접객을 받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사람의 접객은 고객으로서 받아야했을 당연한 것인가?
일본 비즈니스 서적은 포괄적인 내용을 다루고,
그런 책들이 한국에 번역돼 팔려나가기 때문에 크게 위화감을 느끼는 부분은 없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한국에 있는 사람은 일본 비즈니스 서적의 내용에서 이해못할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내 생각에는 전문경영인들이나 읽을 법한 어려운 내용이 담겨서가 아니라,
일본 사회의 특징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일본 역시 IT 엔지니어들이 사회 평균보다 고액 연봉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이들이 경영 일선에서 나서게 된다면 각종 어플리케이션과 웹사이트의 접근성이 좋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고객의 니즈를 조금 더 냉철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큰 집단의 홈페이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고객 또는 투자자가 자주 묻는 정보를 Q&A로 정리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1. 답변을 보기 위해서 한번의 링크 클릭으로 끝나지 않고, 연거푸 3차례를 클릭해야 내가 원하는 내용에 도달할 수 있는 것.
2. 큰 곳의 시스템인데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개선보다는 오류코드 및 그에 따른 증상설명, 대처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
3. 보증대상의 내용이 아니므로 책임을 질 수 없다는 말을 직접하기 어려워서 빙빙 돌려말하는 것.
내가 아주 싫어하는 것들이다.
서론이 아무리 길어도 언젠가는 본론을 말했으면 한다.
상대방에게 크게 실례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 안되고 있으니 이렇게 해보자고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IT업계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들이 사람들이 원하는 답변을 찾기 어렵도록 빙빙 돌리는 것을 의도했을 리 없다.
왜 불편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가?
원하는 내용이 없어 문의를 하면 많은 조직의 경우, 어떤 상황에서 왜 해결이 안되는지,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담당자의 의견은 모두 빠진 채로 답변이 온다.
책임을 지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직원이 업무상으로 지게되는 책임은 최악의 경우가 징계해고, 중대과실이면 + 사측으로부터의 손해배상 청구지만,
회사는 크게 잘못된 것이 있으면 소송을 당한다.
변호사들은 법률은 최후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라지만,
서로를 주요 고객사로 여기는 회사끼리도 소송을 벌이기도 하니 생각보다 법률분쟁은 흔하다.
보신만을 위한 답변은 무가치하고, 고객에게 불쾌한 경험만 안긴다.
그리고, 나만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경어를 아무리 정중하게 써봤자 대면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경어 부분은 다 빼놓고 필요한 부분만 읽는다.
대놓고 빈정거리는 게 느껴지지 않고서야 '건방지게 경어 수준이 형편없네' 라는 생각같은 건 일절 않는데도 말이다.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는 선을 지킨다면 고급스러운 경어 구사 수준보다 문제 해결이 더 중요하다.
수년전에 인터넷에서 모 화학품을 제조하는 한국 회사의 고객센터 담당자가 달변이라며 칭찬하는 글과 함께
그 담당자가 고객문의에 단 글이 소개된 적이 있다.
굉장히 긴 글이었으나
"제조사 권장을 따르지 않고 임의로 사용했으므로 이에 대한 부작용은 책임을 지지 못함."
이에 그치지 않는다.
결국 담당자는 본인의 지식을 뽐내며 고객을 살살 긁으면서(?)
어쩌면 그렇게 무지하냐는 냉소적인 답변을 길게 작성했을 뿐이다.
고객은 자신의 부주의였다고는 하나 본인의 건강이 염려되어 제조사에게 문의를 한 것인데 얼마나 황당하고 기분이 나빴을까?
이와 같은 이유로 나는 누군가 논리적으로 말을 하려 애쓰며 단호한 태도를 취한다고 해서 그가 달변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사람은 고객의 불편함(불안감)을 해결해준 것이 아니라, 불쾌감만 안긴 것이다.
이러쿵저러쿵 내 의견을 늘어놓았지만,
일본 사회의 매너와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개성을 지킨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나는 일본사회내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어떤 비교우위를 갖는가?
시간당 요금을 청구하는 내 서비스는 어떠한가?
고객에게 감동을 주겠다고 액션만 취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돈값을 하는 프로가 되었는가?
클레임이 두려워서 모르는 걸 인정 못하고 되도 않는 이야기로 시간을 끌지는 않았는가?
나이를 먹으면 나라는 사람을 스스로가 더 잘 알 수 있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10대나, 20대 초반처럼 고민거리를 하나씩 줄여나갔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주변 형님들과 한 잔 마시며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때면
형님들도 그런다.
늘 불안하지만 남에게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 애쓸 뿐이고,
누구나 고민거리가 있다고.
그리고, 동네형들이랑 모여서 하는 동아리가 아닌 이상 일은 항상 잘해야 한다고.
불편한 것을 순응하는 것도 삶을 부드럽게 사는 방법일지 모르는데,
철이 덜 든 것인지 내게는 나이를 먹어가며 더 깊어지는 고민인가보다.
불편한 것이 당연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가치있는 형태로 다듬어져 제공될 수 있다면
그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