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pan/コンクリートから這い上がる

내 굴비는 어디쯤에?

미니몹 2025. 1. 27. 20:00

 

블로그에 번번이 글로 옮기지는 않지만, 나는 일본에서 많은 것을 느낀다.

아무리 이곳에 녹아들려 애써도 이국에서 마주치는 것들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더 지나면 이국이 아니라 고향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일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고 다양하지만, 한편으로도 제한되는 것이 있음을 느낀다.

 

사회적인 편견과 내 능력의 한계,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의 한계 어느쪽이든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딱부러지게 말할 수 없지만 제약을 느낀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신논현역으로 책을 보러가기 위해 돈을 쓰던 시절이 있었다.

20대 초중반의 나는 대부분의 또래처럼 돈이 없었고,

나는 유난을 떠는 편이었기 때문에 운동삼아 걷는다며 버스로 2정거장 갈 거리를 걸어다닌 적도 있다.

우습게도 신논현역에 다녀오기 위해 필요한 교통비라는 것은 아무리 비싸도 1시간의 최저시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이었다.

 

내가 교보문고로 책을 보러간다는 것은 그곳에서 고를 여러 권중에 한 권은 골라 사가지고 돌아온다는 것이었고,

그만큼 내 머릿속이 몹시 복잡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이었다.

서점에 가지 않고 온라인으로 주문을 하면 정가에서 할인도 받고, 교통비도 들지 않는데

나는 굳이 그곳에 갈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때의 생각은 "가서 책을 고르면 다른 것도 더 읽어볼 수 있고, 원하는 내용인지 알아보고 살 수 있다."라는 것인데,

수험서를 고르는 것도 아니고...글쎄. 서점에 가면 1~20분만에 나오지도 않으면서 정말 그게 옳은 판단이었던 걸까?

 

 

이처럼 돈에 신경 쓴다면서 시간을 신경 쓰지 않을 때도 있고,

시간에 지나치게 신경을 쓸 때는 아주 효용이 떨어지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런 것을 신경쓰는 것에 질려버려 제멋대로인 선택, 그냥 마음이 편할 것 같은 선택을 하는 게 아닐까?

나중에 돌이켜보면 '멍청했다' 싶은 판단을 내리고 후회를 하는 게 정말로 당연한 걸까.


 

 

내가 나리타에 내려서 도쿄 이케부쿠로까지 버스로 가려면 3,000엔 이상 필요하다.

3,000엔 가량의 리무진은 과거 1,000엔 버스로 알려진 버스에 비해 캐리어를 하나 더 싣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전철보다 더 느리지만 그럼에도 리무진 버스를 타는 것이 최선이라는 판단을 할 때가 있다.

짐이 많아 캐리어를 들고 갈 자신이 없을 때다.

 

환승을 거치며 캐리어 2개를 계단으로 캐리어를 들고 오르락내리락 할 것인가,

적어도 도쿄까지는 편하게 들어올 것인가에 대한 고민.

 

전차를 타면 분명 저렴한데다 시간도 더 빠른데, 주위에 민폐를 끼친다는 불편한 마음을 이겨낼 자신이 있는가?

나는 정말로 캐리어 2개와 백팩을 가진 채로 전철을 타고 집에 갈 수 없는가?

 

운송제한이라며 역무원이 날 붙잡을 확률은 거의 없을 테고,

결국 남들의 눈치와 커브길에 흔들리는 순간만 견뎌내면 되는 것 아닌가?

출퇴근시간에 캐리어를 들고 탄다는 게 그렇게나 큰 민폐인 것인가?

 

때로는 별같지 않은 것들도 고민을 하게 된다.

 

하다못해 이처럼 집에 어떻게 갈 것인가 하는 단순한 고민뿐 아니라,

내 인생을 걸어야 하는 여러 가지 고민들에 대해 오랜 고민끝에 결정하면

사실 그렇게 유효타가 많지 않았다.

 

심지어는 전략적으로 접근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예 빗나가서 눈물을 삼킬 때도 있었고,

뭣도 모를 때 엉겁결에 얻어걸려 좋은 결과를 얻은 적도 있다.

 

그렇다면 내게 있어서 '숙고'한다는 것은 행동만 늦출 뿐이 아닌가?

大谷翔平같은 일류선수도 야구장에서 무조건 안타를 칠 수 있는 게 아닌데...

비범하지 않은 사람도 목표를 정했으면 그 안에서 어떻게든 극복할 길이 있는 것이 아닐까?

 


 

 

 

몸을 만들기 위해 헬스장에 간다거나 자격시험을 준비한다거나

나는 통상적으로 오랜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들에 도전해야 할 때면, 우선 좋은 점을 먼저 살펴본다.

내가 도전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것들, 개인적으로 흥미를 갖는 것들을 참아내고

달성하고 싶은 것 또는 달성해야 할 것에 개인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무언가 얻을 게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향상심과 욕망은 약간 다른 것 같다.

내게 없는 것을 가지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욕망이라면,

향상심은 그 욕망을 사회적으로 비난받지 않는 테두리 안에서 이뤄낼 수 있는 방향을 찾아내 노력하는 성질이 아닐까?

가지고 싶은 욕망에서 출발하되, 이뤄내려고 발버둥치는가 발버둥칠 생각조차 않고 부러워만하는가의 차이인 것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좋은 점을 잔뜩 본 뒤에 나쁜 점이나 애로사항을 살펴보는데

나는 이미 좋은 점을 받아들이고 나면, 힘든 것에 대해 크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원체 리스크가 큰 것을 고르는 성향이 있는 것일까.

눈에 훤한 리스크를 무시하고, 그걸 잘 넘겼을 때의 경우만 바라보기 때문인 걸까.

대개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것들은 달성이 어려운 대신 성공하면 큰 보상이 달려있는 경우가 많았다.

 

같은 도전을 하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종종 쉽게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개는 자린고비처럼 굴비 한마리 천장에 매달아놓고 침만 꿀떡 삼켜가며 연거푸 간장에 밥술만 뜨고서야

간신히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이란 걸 간신히 깨닫는다.

 

살면서 그런 것들에 도전하는 것이 쉬울 리 없다.

점점 마음이 꺾여나가고 마른 멸치라도 핥아볼까 싶을쯤이면 굴비는 점점 멀어지고 만다.

밥상에 얼마만큼 내려와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젓가락으로 척 집어 끌어내릴 정도가 되지 못하면

도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그간 투자한 노력은 모두 잡지식쯤으로 남고 만다.

 

나는 원하는 것 또는 그보다는 열화된 것일지라도 (어쩌면 만족할 수 있을지 모르는) 다른 길이 있음을 아는 순간,

밥상을 옮긴 적이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또다른 굴비 한마리가 천장에 매달려있었을 뿐이다.

처음부터 굴비를 다시 내려야 한다.

 

요즘 드는 생각은

내가 굴비를 발라 맛보기는 커녕 내려보지도 못하고,

바지가 헤지도록 엉덩이를 끌고 다니며, 長丁場의 시간속에서 얻어진다는 환상속에 내 인생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저 굴비만은 아닐텐데 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도

오늘도 굴비를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키는 걸 보니 덤벼들지 않고는 어쩔 수 없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