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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엔 시부야의 이치란에 들러 라면을 먹었다.
90분 대기해야 한다고 해서 여느 때와 같이 포기하고 집에 갈까 하다가
오랜만에 평일 오후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겠다 싶어 근처 스타벅스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720엔 정도 하는 딸기 음료는 내 취향은 아니었다.
평소라면 "아메리카노지?" 라고 물어오던 아내가 뭘 마시겠냐고 물어봤다.
신쥬쿠 스타벅스 사건이 있었기 때문일 거다.
내가 한국 스타벅스에서 마시는 메뉴는 8할 이상이 아메리카노다.
종종 말차라떼나 신메뉴, 기간한정 차 메뉴가 있으면 그걸 주문하는 정도다.
다른 카페에 가도 어지간하면 아메리카노. 라떼는 거의 주문하지 않는다.
그러니 아내가 자연스레 커피라면 아메리카노를 물어보는 거다.
일본 스타벅스는 올봄 들어 사실상의 가격인상(지역별 가격차등제 도입)을 했다.
임대료가 비싼 매장에서 마시면 돈을 더 내야한다는 이야기다.
차등가격제 도입과 더불어, 신쥬쿠에서 마신 아메리카노에 충격을 받아 한동안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지 않았다.
아무리 강배전이라는 스타벅스지만, 어떻게 원두찌꺼기로 한번 더 내린듯한 맛이 났는지 의문스럽다.
작년에 요코하마에서도 이런 요상한 맛의 아메리카노가 나와서
정량의 물이 들어갔는지 물어봤을 정도니 한국과 일본 스타벅스의 레시피가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이쯤되면 내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아 사족을 붙인다.
많이 마실 때는 하루 4,5잔까지도 마실 정도로 커피를 좋아하지만, 사실 나는 음식 맛을 잘 모른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재료가 들어있지 않고,
먹어봐서 간이 맞으면 맛있는 거라는 생각이기 때문에 좀처럼 미각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이런 내가 듣기로는, 스타벅스는 전세계 어디서 마셔도 똑같은 레시피로 제조하기 때문에
(에스프레소 머신이 동일할테니) 지점에 따라 맛의 차이가 거의 없어야 하는데,
일본의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도대체 이건 무슨 맛인가 싶은 아메리카노가 나온다.
아메리카노가 아닌, 주욱 짜낸 룽고같은 맛이 느껴진다.
한국 스타벅스에서도 지점 차이를 느낀 적이 있기는 한데,
커피와 물 외의 것들을 얼마나 더 넣고 덜 넣느냐가 영향을 주는 메뉴였기 때문에
만드는 사람의 차이라고만 생각했다.
사실 아메리카노를 기본 메뉴로 취급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에는 체인점이 아니면 아메리카노를 파는 카페가 그리 흔하지 않다.
언젠가는 자주가는 카페에 아메리카노 비슷한 이름의 메뉴가 있어서 물어봤더니
드립커피이지만, 통상적인 블랙커피보다 좀 더 연한 것이라는 설명이 돌아온 적도 있다.
굳이 따지자면 드립커피가 주류에 가까운듯 하며, 에스프레소라도 아메리카노보다는 라떼를 해먹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러니까 매장의 바리스타라도, 아메리카노를 만들기보다는 카페라떼를 만드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이야기다.
핸드드립이 바리스타의 실력, 손맛을 나타내는 거라면
나는 굳이 그런 모험을 즐기고 싶지 않기 때문에 머신을 선호한다.
바리스타가 만든다면 모를까, 아무리 일본이라도 아르바이트생이 내려주는 커피에
본인 또는 가게의 집념, 연마된 기술이 담겨있으리란 생각을 안하기 때문이다.
내가 커피를 좋아하는 것은 향을 즐기는 것도 있지만,
뭔가의 작업을 시작할 때
나는 커피를 준비했으니 이제부터 작업 모드에 들어간다고 몸에게 알리는 스위치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맛이 좋다면 다행이겠으나 부정적인 맛이라면 뭔가 찜찜하다.
역시 사람의 기분도 맛에 영향을 주는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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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는 캡슐머신도 있고, 드립 커피백이 박스채로 있다.
드립커피가 흔한 일본에서도 드립 커피백을 박스채로 산다는 이야기는 잘 못 들어봤다.
그 외에도 귀찮을 때와 2번째, 3번째 커피를 마시기 위한 가루커피도 있고,
가끔은 커피 원두취급 매장에 가서 원두를 갈아올 때도 있다.
그래서 나도 드립커피를 내려마시는 일이 많지만, 번번이 향과 색, 맛이 이상적으로 생각되는 맛이 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120ML의 물을 1~2분동안 3~4회에 걸쳐 나눠붓는다고 했을 때
번번이 120ML를 재서 붓지도 않거니와 적당한 휴지기(2~30초 가량)를 두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종이필터의 보관시 일상생활의 냄새가 베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멀쩡한 원두를 갈아온지 얼마 되지 않았더라도 필터의 잡내가 커피의 향을 해치는 경우도 있다.
휴일에 아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내려줄 때면 나름대로 가이드라인을 잘 지키려, 스톱워치를 두고 내려주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며 뭘 그렇게까지 하냐며 웃지만,
내가 내려준 커피가 더 맛있다고 하는 걸 보면
서비스를 받는다는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분명 물을 붓는 속도, 양, 휴지시간의 영향이 있어보인다.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커피가 나올 때까지 바리스타들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자면,
(실례되는 말이나) 매번 그들이 추구하는 커피가 만들어질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기다리는 손님이 많아 줄을 설 정도인데, 매번 최선을 다해 만들어낼 수 없지 않을까.
나는 이러한 이유로,
엄청 유명한 곳보다는 적당히 한가해보이면서도
손님도 제법 드나드는(원두 소모가 적절히 되는) 카페의 바리스타가 가장 맛있는 커피를 내려준다고 생각한다.
만약 숙련되지 않은 아르바이트생이 내려주는 커피라면
그들의 손보다는 머신을 믿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그게 내 생각이기 때문에 드립보다는 머신커피를 좋아하는 것이다.
내가 말차를 좋아하는 이유도,
전통 다도에서 말차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커피로 치면 잘 만들어낸 말차는 드립에 가깝기 때문이다.
(회전초밥 먹으러가서 물만 대충 타먹는 거 말고..그것도 좋아해서 2잔씩은 마심.)
그러나, 현실적으로 내가 주로 마시는 건 보통의 2배가 진하게 우러나는 조금 비싼 티백이다.
번번이 정성들여 말차를 내릴 수가 없기 때문에 물을 부어놓고
셔츠라도 다리다가 "아! 까먹었네. 다 식었네.." 하면서 아쉬운대로 호로록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나치게 우러나거나, 차의 온도가 65~75도 이상,이하가 돼서 맛이 변할 수는 있지만
누가 만들어도 큰 차이가 없는 것이 티백(에스프레소 머신)의 장점이라 생각한다.
카페에서 스페셜티라고 불리는 비싼 커피들을 시키지 않고서야
원두의 종류, 원두의 맛, 특징, 로스팅은 어떻게 하는지 일일이 묻기도 그렇고,
설사 알려준들 바리스타만큼 자세히 알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원래 그 머신이 뽑아낼 수 있는 맛을 내주는 가게가 낫지 않을까.
나는 그가게의 누가 만들어도 맛이 달라지지 않는 커피를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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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유명한 폴 바셋.
아내와 한국에서도 마셔보고, 일본 본점에서도 마셔봤으나
한국에서 마신 룽고는 아이스 룽고라서 그런지 그냥저냥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일본의 본점에서 따뜻한 룽고를 큰 사이즈로 주문했다가 산미에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주문하는 줄에 서있는 동안 바리스타의 작업을 살펴보기도 했으나
내 커피를 본 순간 "어? 이거 색깔이 불안한데" 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
룽고라서 그런지 강렬한 산미가 느껴졌다.
이곳의 커피는 내가 신맛이 느껴지는 커피를 싫어함에도 그것을 특색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였다.
산미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아주 추천할만 하다.
이때, 재미있게도 주변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라떼를 마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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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엔 아내가 좋아하는 카페에 갔다.
코로나 이전에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관광객은 거의 있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줄도 길게 서있고 한국 사람을 포함한 외국인이 많았다.
도쿄타워가 가깝기 때문인 걸까?
뒤에 서있던 부부조차 한국어가 자꾸 들리자 "여기 외국인이 엄청 많네."라는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나만 해도 한국인을 세 팀이나 봤으니 많기는 많다.
한국에까지 이 카페가 소문이 난 건지 정말 도쿄타워에 가까운 편이라 많은 건지.
이 카페는 아메리카노가 메뉴판에 쓰여있지 않았지만, 금방 에스프레소가 눈에 들어왔다.
'에스프레소 있음 = 아메리카노 가능' 이라는 생각을 했다.
(여기도 라떼가 유명한 카페라, 라떼 외의 메뉴를 시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내에게 메뉴를 부탁하고 자리를 맡으러 먼저 2층으로 올라갔는데,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아메리카노는 없는 것 같은데 뭐가 좋겠냐고 하길래
그럼 카페라떼를 주문해달라고 했다.
이름이 불려 커피를 픽업해보니 아메리카노가 나와있었다.
응? 아메리카노 없다고 했는데?
이거이거 색깔이 폴 바셋의 룽고와 거의 흡사하다.
안 마셔봐도 알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역시나 강렬한 산미.
폴 바셋의 커피는 신 맛이 강렬하지만, 거슬리지 않고 개성처럼 느껴졌다면
이곳의 아메리카노는 신맛이 거북스러운 느낌이었다.
대체로 스타벅스같은 곳이 아니면 아메리카노보다 라떼의 양이 많은 편이지만,
라떼보다 현저하게 작은 컵 사이즈에 "라떼보다 얼마나 저렴해 이거?"
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은 스타벅스에 숏 사이즈가 메뉴판에 적힐 정도로 대중적인 사이즈다.
그러나 나는 어지간하면 톨을 주문하고, 가끔 그란데를 마시는 편이다.
밥먹고 들리거나 잠깐 쉬려고 들리는 게 아닌
'일부러 카페를 찾아 떠나는 날'에는, 스타벅스 숏 사이즈쯤으로 나오겠거니 하고 큰 것을 시키는 편이다.
"응? 거의 차이 안나는데."
"그래? 좀 적네. 그리고 일본 사람들은 아메리카노 맛을 모르나봐..내가 상상한 건 이게 아닌데."
"사람들이 맛을 모르는 게 아니라, 아메리카노를 거의 안 마시잖아."
"신쥬쿠 그..밖에서 비둘기 보면서 마시던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기억하지?"
"응, 거기 아메리카노가 무서워서 이젠 아메리카노 잘 안 마셔."
"이 커피, 솔직히 세븐일레븐 커피보다 별로야. 집에 있는 일리 캡슐이 내 입맛에 더 맞아."
"원두 종류가 엄청 많아서 선택할 수가 있던데? 기본 블렌드는 이런 맛인가봐. 미안해, 세븐일레븐에서 커피 사줄게."
"그정도는 아니야. 괜찮아."
역시나 주변은 거의 다 라떼였고, 캔커피를 들고 온 커플의 남자만 콜드브루를 주문했다.
그제서야 나는 산미가 있는 편이 라떼로 만들었을 때 맛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타벅스의 라떼 종류에서(에스프레소 베이스뿐 아니라, 다른 메뉴를 포함해서)
우유 맛이 강하게 나는 건, 베이스보다 우유 비중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라떼가 맛있다는 카페를 가보면 십중팔구 커피 색상이 "응? 이거 괜찮아?" 싶은 것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강한 신맛을 우유가 중화해주고, 우유의 비릿한 맛을 신맛이 잡아주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게 아닐까.
아무튼간에 새로운 카페에 왔으니 입에 머금으면서 맛을 보는 시늉이라도 할텐데,
또 당했다(?)는 생각에 페트병에 들은 차처럼 꿀꺽 마셔버렸다.
내가 일본에서 만족스럽게 마신 아메리카노는 두 군데밖에 없다.
사실 블루보틀말고는 잘 기억이 안나는데, 아내는 어딘가에서도 내가 좋아했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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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생활중 그리운 건,
워낙 카페가 많아서 조금만 걸어나가도 저렴한 아메리카노가 많았다는 게 아닐까?
특색은 없어도 나는 커피를 마신다는 생각이 들어 좋았다.
그리고, 맛은 몰라도 사람들과 함께 일하던 중에 한잔씩 홀짝이며 이야기를 나누던 휴식시간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커피 한잔 하실래요? XX커피말고요. 다른덴 다 좋아도 거긴 별로예요."
"커피를 맛으로 먹냐? 일하려고 먹지."
"하긴 그렇죠. 그럼 아이스로 할게요. 가시죠."
올해는 한국에 계신 분들께 일본의 드립백을 보내드려야겠다.
귀찮더라도 마실 생각이 들면, 잠시나마 맛을 느껴보시지 않을까?
p.s. 일본 카페에 관련된 책들이 많이 나와있지만,
그보다는 구글에서 찾아보거나 내가 모르는 곳에서 우연히 들어선 카페가 날 설레게 한다.
지쳐있다가도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이,
커피가 주는 기분 좋음이 아닐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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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기 전에 커피를 한잔 마셨습니다.
글을 마칠 때쯤 되니 커피 이야기만 잔뜩하고, 시간도 제법지나 또 한잔 마시고 일을 시작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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