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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사수의 방으로 불려갔습니다.
명함지갑을 가지고 오라는 그의 말에,
손님을 소개받는 자리인가 싶어 옷매무새를 다듬고 들어갔더니 손님은 계시지 않더군요.
“미니몹 씨, 내가 어제 봤는데 말이야. 그렇게 인사할 거야?”
“네?”
“손님에게 하는 농담이나 업무 진행은 다 미니몹 씨 스타일이니 그렇다고 치자고.
그런데, 기품 있는 모습으로 대할 수는 없겠어? 당신은 우리 회사의 대표란 말이야. 잊지 말라고. 격을 낮추지 마.”
제 접객이 나빴다는 겁니다.
저는 일본의 외국계 회사에 재직 중이고, 제 사수는 소위 말하는 C-level에 있는 사람입니다.
사수나 그와 비슷한 위치의 손님들을 자주 만나다 보니, 나중에 사수의 방으로 불려가 제 행동거지를 지적받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날 그는 15분 후 회의에 들어갈 때까지 저를 세워놓고 비즈니스 매너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회삿밥을 거저먹은 것은 아니니 예전 같으면 불편하게만 느껴졌을 자리들도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그들을 대하는 데 익숙해졌다고 착각했었나 봅니다.
사회 초년생 때도 지적당한 적 없는 내용으로 혼이 나다 보니
밖에 있는 후배들에게 안 들리나 속으로 온갖 생각을 다 했습니다.
평소에 업무 보고를 할 때면 찾아온 손님을 알리는 연락이
제 일을 방해하는 느낌이 들어 싫었는데, 그날은 손님이 찾아왔다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기뻤습니다.
그의 방에서 나와 자켓을 벗었는데, 아침의 샤워가 무색해지게 등줄기에 땀이 주르륵 흐르더군요.
아무 일 아닌 것 처럼 넘기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오전 일과를 치웠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날카롭게 굴거나 표정을 구기고 있을 것 같아 공원으로 나섰습니다.
빵을 입에 밀어넣다 문득 생각해보니 그가 한 말은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제가 그의 기대치에 달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가끔 술자리를 갖게 되면 그는 제 나이를 종종 다시 묻곤 합니다.
아직 너는 내가 원하는 수준이 아니라고 돌려 말하는 셈이라, 씁쓸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는 제가 독립하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작은 회사의 사장이 되었을 때를 대비해 미리 연습을 시켜주려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일본에 살다 보면 원하든 원치않든 까마귀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심각한 업무 전화를 받다가 바람을 쐬러 잠시 난간에 섰습니다.
서로간 '일하고 있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한 통화가 이어지던 참에 까마귀가 보여
형식적인 반응만 보이며 까마귀를 관찰했습니다.
일본에 까마귀가 흔해도, 까마귀가 눈앞에 가만히 서 있는 경우는 잘 없는데
통화를 하는데 울어대길래 안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털에 윤기가 흐르는지도 한번 보고
머릿털은 잘 정리했는지도 한번 보다 보니 눈도 몇 번 마주쳤는데
까마귀는 어딘가 갈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울기만 합니다.
'이 머리 좋은 친구가 뭘 바라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습니다.
전화기를 스피커로 돌려놓고 사진이라도 한 장 찍을까.
상대의 이야기는 점점 큰그림이 아닌 작은 것들로 옮겨갔고, 저 역시 주의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쯤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옆에 앉았습니다.
큼직한 애벌레를 잡아왔더군요. 울고 있던 까마귀에게 먹여줬습니다.
먹이를 받아먹은 뒤에는 서로 몇 번 의사소통을 하더니 큰 까마귀부터 부리를 난간에 닦아냈고,
이윽고 작은 까마귀도 부리를 비빈 후 날아갔습니다.
그제야 상황이 이해됐습니다.
아, 스스로 날 줄 아는 까마귀지만 아직 부모에게는 새끼였던 걸까?
저란 존재도 사수에게는 사실 저 새끼 까마귀 같은 걸까 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가 어렸을 땐, 어른이 되어 사회에 나가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했는데
평소 눈밖에 난 사람이라면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을 것 같은 성격의 사수를 만났습니다.
저는 사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있지만, 그가 저를 일부러 불러 가르쳐주고 있으니 운이 좋은 편입니다.
그는 항상 바쁘고 자리에 없는 날이 태반이고,
저 역시 이 회사를 벗어나려 애쓰고 있으니 배울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습니다만
남은 기간 열심히 배우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수, 부사수와 함께 일하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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